빛바랜 접경에서 5화 - 두 운명(1)
두 운명
다음날, 지은은 역시 결석했다.
기말고사까지 얼마 남지 않아 고작 한 명 결석했다고 반 분위기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들 마무리에 열중이었다. 내게는 다사다난했던 며칠 동안 주변은 그대로였다. 일상. 나는 다시 평범한 하루를 맞이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펜을 잡고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멀리 와 있었다. 이제껏 신경 쓰지 않았던 뒷세계의 이야기를 알아버렸다. 부모님과 내 가문에 대해. 무슨 일이 있었고 왜 이렇게 됐는지. 수업 시간 내내 여러 잡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물론 책상에 앉아 멍하니 고심한다고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프다는 핑계로 야간 자습을 뒤로하고 오후에 하교했다.
운동장의 푸른 잔디는 구름이 내린 그림자에 가려 색이 짙었다. 그 위에는 황금보다 진한 주홍빛 노을이 마지막 불꽃이 타듯 걸어가는 길을 빛냈다.정문 밖으로 하나둘씩 사라지는 학생들 사이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순간 노을빛이 그의 머리카락에 앉아 노란색으로 착각했다.
“안녕하세요.”
이준은 멋쩍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는 당연히 오늘도 결석했다.
“지금이라도 출석 체크하게요?”
“출석은 괜찮아요. 어차피 자퇴할 거예요.”
그는 내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며,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보여줬다.
“어라.”
그것은 은색 목걸이였다. 체인 끄트머리에 있는 눈동자 모양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나는 한 손으로 목 주위를 짚었다. 없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목걸이를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미스트 씨 집에 놔두고 갔더라구요.”
“아…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또 도움받았다. 벌써 세 번째다. 이젠 고맙다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도저히 내 성에 안 찼다. 뭐가 됐든 그의 호의를 갚고 싶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잠시만요.”
등을 돌리려는 그의 어깨를 무작정 붙잡고서 생각이 흐르는 대로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비면,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을래요?”
“저녁이요?”
급하게 떠올린 제안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보답하고 싶어서요.”
내 제안에 이준은 손사래 치며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뭘 바라고 한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그리고 저랑 있으면….”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괜한 걱정은 제쳐두고. 어제는 미처 그를 붙잡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
‘괜찮아요. 나만 믿어요.’
별일 없을 거라고 자부하는 세연의 까만 눈이 확신에 찬 듯 두드러졌다. 나는 그녀의 거듭된 설득에 끝내 넘어갔다. 그리고 덤으로 동갑이니 말을 놓기로 했다.
“저기야. 우리 집.”
세연이 가리킨 곳에는 주위에 있는 주택들을 크기부터 압도하는 갈색 지붕 저택이 보였다. 철창살 대문을 넘어 잘 정돈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마당에 레드 카펫처럼 쭉 깔린 돌길을 따라갔다. 그 끝에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이 있었다.
벽돌이나 시멘트 위에 나무 타일을 덧댔는지, 아니면 순수 목제로 지은 집인지. 어느 쪽이든 세연의 집은 완전히 이질적이었다. 현대 도시에 산골짜기 집을 억지로 지어놓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를 따라 현관 로비를 지나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의 인테리어는 빈티지보다 더 먼, 클래식이었다. 호화로운 장식의 샹들리에 밑으로 고목 가구들이 각자 어우러져 세월의 미를 뽐냈다. 마치 중세 콘셉트의 비싼 호텔 같았다.
“와….”
절로 감탄이 나왔다.
“집 멋지지?”
“응.”
“아버지가 이런 집에 살고 싶다고 해서. 원래 있던 건물을 밀고 다 새로 지었어.”
그녀는 멋은 둘째 치고 청소할 때 신경 쓸 점이 지나치게 많다며 투덜댔다. 그러고 보니 집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 듯했다.
“부모님은 일 나가셨어?”
그 질문이 잘못됐음을. 그녀의 반응을 보고 짐작했다. 거실과 이어진 부엌 싱크대 앞에 선 세연은 접시를 달그락거리던 손을 멈추고서 물었다.
“너희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지?”
“응.”
그녀는 다시 접시를 매만지며 말했다.
“나도. 두 분 다 돌아가셨어.”
괜한 질문이었다.
“…미안.”
“괜찮아. 그 얘긴 됐고. 조금만 기다려.”
세연은 부엌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이 뜨겁게 달궈지고, 도마 위로 올라가는 각종 채소가 그녀의 칼질 앞에 잘게 썰렸다. 침착하고 절도 있게 요리를 해나가는 모습은 능숙함이 배여 있었다.
“요리는 누구한테 배웠어?”
“독학했어. 어릴 때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거든.”
그녀는 대학교 진학도 조리학과로 갈 생각이었다고 덧붙였다.
“자.”
세연이 만든 요리들이 하나둘씩 테이블을 채웠다. 달걀말이에 불고기 조림, 부추 무침, 김치찌개… 평소에 먹는 인스턴트 음식에서 찾을 수 없는 양질의 식사가 가득 차려졌다.
“먹자.”
세연은 맞은편에 착석하자마자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먼저 불고기 조림을 입속에 넣었다. 뭔가를 디테일하게 표현하거나 비유하는 능력이 부족한 내게는,
“맛있다…!”
그 말이 최고의 찬사였다. 세연은 음식을 씹으며 씩 웃어 보였다.
우리는 수저를 빈 밥그릇에 놓을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쉬지 않고 먹었다. 그녀도 많이 배고팠나 보다.
“아, 잘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과장해서, 전투적인 식사였다.
“나 커피 마실 건데, 너는?”
“나도 마실게.”
세연은 곧바로 부엌으로 가서 커피포트와 컵 두 잔을 꺼냈다. 나는 그냥 기다리려니 마음이 편치 않아 빈 접시와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
“냅둬. 내가 나중에 치울 거야.”
“얻어먹었는데 값은 해야지.”
자신 있게 말하며 당차게 첫 접시를 손에 잡았다.
의욕 과다였을까. 아니면 몇 년 만에 해보는 설거지라서 그랬을까.
쨍그랑!
“….”
시작부터 말아먹었다.
불편한 정적이 집안에 흘렀다. 더 나섰다간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 깨진 접시만 치우고 그녀의 말대로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커피포트가 부글부글 끓었다. 은은한 커피 향이 거실에 퍼졌다. 잠시 후 세연이 커피가 담긴 컵 두 잔을 들고왔다.
“직접 원두를 짠 거야?”
“아니. 그냥 믹스 탄 건데.”
우리는 따뜻한 커피를 조금씩 줄여가며 티타임을 즐겼다. 서로 여러 잡담을 주고받았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가벼운 이야기들은 그만큼 부담이 없어 좋았다. 그러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시간이 지나 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에, 세연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그 여자애 있잖아. 지은이라고, 고등학교 때 알게 된 친구야.”
“그 마법사?”
“응. 솔직히 좀 충격받았어. 걔가 마법사였다는 거랑 날 죽이려 했다는 게.”
나는 그 여자가 세연을 죽이려 한 이유가 궁금했다.
“‘재단’이라고, 큰 마법사 조직이 하나 있어. 우리 가문이 그 조직한테 찍혔나 봐. 그래서 뭔 수배 대상에 올랐더라.”
세연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부모님도 그 사람들한테 죽었어. 해외 출장 가신 사이에.”
그녀는 고작 이틀 전에 그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재회한 날. 나는 눈이 부어터질 정도로 끝없이 울어댔다. 거짓말이라고 그 비행기 사고를 부정하며 통곡했다.
상황은 비슷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뭇 달랐다. 진지했다. 표정이 어두웠지만 불안해 보이진 않았다. 그것은 직면한 상황에 절망한 것이 아닌, 왠지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아마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찾아오겠지.”
부모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다. 그야말로 불우한 운명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세연에게서 문득 내가 비쳤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느낀 감정은 내 처지를 생각해보면, 사치였다.
동정. 연민.
나와 같이 늪에 빠진 그녀가 불쌍했다.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고. 잠시, 내 신세에 맞지 않는 걱정을 했다.
같은 길을 오랜 시간 동안 겪어온바, 세연에게 선택지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체념.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한다.
“뭐 어쩌겠어.”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든 맞서야지.”
힘이 닿는 데까지. 한 발자국 더 나아갈 것이다. 그리 선언했다.
내가 물었다.
“혼자서?”
세연은 내 물음에 실없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래야지. 어차피 1년 넘게 혼자 지냈는데 뭐가 어렵겠어.”
이야기는 거기까지. 티타임이 끝났다. 시간은 어느새 열 시 정각에 가까웠다. 나는 음식을 대접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마중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도 세연은 대문 너머로 내가 멀어질 때까지 등 뒤를 지켜주었다.
그녀가 날 초대했을 때 확신했던 그대로. 그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
이준을 보내고 나는 서재에 틀어박혔다. 저번처럼 다시 찾아올 위험에 대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찾아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내 부모님이, 우리 가문이 수십 년을 바쳐 연구한 그것. 세계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재단’에 낙인찍힐 정도로 위험한 그것의 정체가 궁금했다.
나는 책장에 있는 연구 자료를 모조리 들어내 바닥에 깔았다. 주저앉아 자료를 하나씩 검토했다. 그 연구에 관해서는 하나도 모르지만, 그런 큰 단체가 주목할 스케일이라면 자료만 보더라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으리라
그런 자료를, ‘그것’을 찾은 때는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나서였다.
◆
다음 날 저녁, 미스트 씨와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중이었다.
“준아. 오늘 예약자 있었어?”
“오늘은 없어요.”
“…불청객이 왔네.”
미스트 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리 말했다. 아무도 없어야 할 집 창문에 빛이 환하게 비쳤다.
또각. 또각. 계단을 밝고 올라가는 미스트 씨의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불청객 한 명이 우리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늦었네요.”
그 한 마디에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불청객은 자기가 이곳의 주인인 양 미스트 씨의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는 갈색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고동색 눈으로 날 응시했다. 입가에는 저번에도 학교에서 본 적 있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의뢰를 맡기려면 사전에 연락 먼저 해주면 좋겠는데.”
미스트 씨는 목소리부터 대놓고 날이 서 있었다.
“그럴 정도로 한가하지가 않아서요.”
내 담임선생님, 재훈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대답했다.
“‘재단’에서 왔나?”
그녀의 질문에 그는 손에 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손바닥에 딱 맞는 크기의 푸른색 케이스. 안에는 여권처럼 그의 사진과 신상이 적혀 있었다.
“‘재단’ 제3기관 소속 수사관, 김재훈입니다.”
“높으신 노친네들 뒷바라지하느라 바쁜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일까?”
재훈은 이번에는 종이 한 장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얘, 본 적 있으시죠?”
종이 한 면에는 큼지막한 증명사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끔한 베이지색 교복을 차려입고 정면을 주시한 그녀.
세연이었다.
미스트 씨는 책상을 쾅- 내리치며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로 경고했다.
“의뢰를 맡기려면 사전에 연락하고 다시 오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나?”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도 재훈은 여유를 잃지 않고, 도리어 책상에 턱을 괬다.
“허락 없이 집에 들어온 건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죽일 듯이 나올 필요는 없잖습니까?”
“너 설마 날 모르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잘 알죠. 당연히.”
추방자. 재훈은 그녀를 그렇게 칭했다.
“그럼 내가 너희를 어찌 생각하는지도 잘 알 텐데?”
“그래도 수사관으로서 명분은 지켜야 해서요.”
재훈은 가방에서 폴라로이드 사진 몇 장을 꺼내 마술사가 트럼프 카드를 깔 듯 가로로 쫙 정렬했다. 사진 속에는 미스트 씨 집 근방을 배경으로 여러 사람이 있었다. 거기에는 나도 있었고, 미스트 씨도 있었고.
그녀도 있었다.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 제가 어떻게 그냥 넘어가나요.”
“…저번에 지인이 데려와서 치료해준 게 다야. 이름도 몰라.”
“정말로요?”
“내 말을 믿을 생각이 있긴 하나?”
“이런 일에 의심은 필수죠.”
“…재수 없는 새끼.”
미스트 씨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재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어쩔 수 없죠. 다만 이제부터 그 애와 또 엮인다면, 이번처럼 그냥 넘어가긴 힘들어요.”
“네가, 날?”
“저만 나선다면 다행이죠. 윗사람들이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그럴 일 없으니까 꺼져. 빨리.”
재훈은 경한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그만 물러났다. 살벌했던 두 사람의 언쟁이 겨우 끝났다.
“준아.”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내 이름을 불렀다.
“잠깐 밖으로 나와 볼래?”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대차게 닫고 나갔다. 미스트 씨는 소파에 등을 더 파묻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말했다.
“저, 그럼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아는 사람이야?”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라는 대답에 그녀는 혀를 찼다.
“애 하나 잡겠다고 신분 위조까지. 별짓을 다 하네.”
혹여나 여기서 그녀를 더 건드렸다간 괜히 심기만 더 불편하게 만들 것 같아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이것은 조금 훗날의 이야기지만. 만일 그때 내 앞날이 이리될 줄 알았더라면, 미스트 씨에게 여태껏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미리 전했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오늘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널 이런 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저도요.”
재훈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세연이랑은 예전부터 알던 사이니?”
“최근에 몇 번 만났어요.”
“그럼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 애를 도왔니?”
“아니요. 보고만 있을 순 없었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며칠 전 두 사건은 재훈과 연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아까 저 여자 집을 좀 조사해봤지. 거기서 네 자료를 찾았단다.”
그는 내 비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먼저, 난 얘기가 끝나자마자 그 앨 죽이러 갈 거야.”
당당히 살인을 예고하는 모습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그는 수사관으로서 맡은 바를 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했다고 살인이 용납되지는 않는다. 세연이 들려준 그녀의 이야기. 아무리 그녀의 가문이 세계를 붕괴할 정도로 위험하더라도, 고작 그 핏줄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그녀가 죽어야 한다니.
“그건 싫겠지?”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하는데.”
“어떤….”
재훈은 씩 웃었다.
“널 나한테 줘.”
“네?”
“말 그대로야. 너처럼 특별한 존재는 드물거든.”
그는 내게 흥미가 생겼다. 따라서 내가 평생 그의 실험체가 되어준다면, 세연을 쫓는 것은 여기서 그만두겠다고 약속했다.
묘하게 한 단어가 거슬렸다.
“실험체라는 게 무슨 말인가요?”
“네 능력에 대해 전부 파헤쳐 볼 거야. 네가 할 일은 없어. 네 팔다리를 자르든 불에 지지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말을 잇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주름이 배였다. 기뻐하는 그 모습이 섬뜩했다.
세연을 살리고 싶다면 ‘나’를 포기해라. 아니면 그녀를 포기해라. 한 마디로, ‘나’를 자신에게 달라는 소리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재훈은 단칼에 잘랐다.
“아까 들었겠지만, 내가 그럴 만큼 한가하진 않아.”
더 지체할 수 없다. 지금 여기서 결정해야 한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다른 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대로 타인을 해질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릴 바에,세상과 멀어지는 것이 나았다. 아무도 나 때문에 다치지 않고, 아무도 나 때문에 죽을 일도 없어진다. 여태 짊어온 짐을 내려놓을 기회였다.
죽음. 진짜로 죽진 못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토록 바란 결말이 아닌가.
“전….”
뭐 어쩌겠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봐야지.
그녀가 했던 말이다.
왜 이 시점에 그 말이 떠오르는지. 같은 운명 속에서 다른 길을 선택한 그녀를. 어째서 이제야 동경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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