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접경에서 1화 - 방해받은 주말
두 개의 하늘이 있었다.
푸른 평야로 뒤덮인 파란 천공.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검은 암흑.
나는 그사이, 빛바랜 접경에 서 있었다.
방해받은 주말
허연 입김을 입 밖으로 푹 내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평일이 얼마 남지 않은 일요일 저녁. 12월 한파가 몰고 온 차디찬 바람에도 번화가의 네온사인들은 꺼질 줄 모르고 알록달록하게 번쩍였다. 그 아래 많은 인파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말 밤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그 무리 속에 있었지만, 이곳에 온 목적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어제 담임선생님의 전화 한 통만 없었더라도. 나 역시 그들처럼 친구들과 휴일을 만끽했으리라.
‘우리 반에 가정방문이 필요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선생님이 주말에 좀 급한 일이 생겼거든.’
대신 일을 맡아달라고, 그리 부탁했다. 어이가 없었다. 학생 가정방문을 같은 학생에게 넘기는 선생이 어디 있는가.
물론 복잡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반에 밥 먹듯 무단결석한 학생의 집에 찾아가 몇 가지 확인만 하면 된다. 그저 주말에 내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 짜증났다. 가뜩이나 반장을 담당하고 있어 일을 거절하기는 또 그랬다.
그래서 어제부터 일을 미루다가 결국, 일요일이 끝나갈 즈음에야 몸을 움직였다.
무단결석자의 이름은 이준.
그는 2학기가 시작할 무렵 전학을 왔다. 염색이 아닌 천연이라는 흔치 않은 백발이 인상적인 친구였다. 조금 음침하고 무서운 외모와 달리 자기소개를 할 때 되게 부끄럼을 많이 타기도 했다.
그게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다음 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번화가를 지나 인적 드문 주택가로.
담임선생님이 보내준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다른 집들과 조금 떨어진 1층 단독주택이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경쾌했다. 안은 잠잠했다. 사실 창문 너머로 불이 꺼져 있어 아무도 없을 것이라 짐작했다.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돌아가려던 찰나, 벨에 갖다 댄 손가락을 뗐다. 가만 보니 문을 잠그지 않았는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어 집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굳이 문을 마저 열었다. 명백한 무단침입이지만, 그럴 필요가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가 눈대중으로 발견한 스위치를 올렸다. 하얀 형광등이 집안의 어둠을 순식간에 걷어냈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님을 확인했다.
난장판. 그 단어 하나로 집안의 상태를 요약하기에 충분했다. 사방이 나무줄기처럼 갈라진 바닥과 갈기갈기 찢어진 벽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몇 없는 가구들은 툭 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의도치 않게 폐가 체험을 하게 된 나는 조심스레 안쪽으로 들어가 거실 형광등을 켰다. 형광등은 교체한 지 얼마 안 됐는지 빛이 깔끔했다. 거실 곳곳에 인스턴트 음식 봉지들이 수두룩했다.
군데군데 생활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가 이곳에 사는 것은 맞는 듯했다.
쿵.
갑자기 닫힌 문소리에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충 자른 듯 어수선하고 짧은 백발이 불빛에 배여 더욱 빛났다. 상체는 한 치수 큰 회색 후드 티를 입어 조금 넓어 보였지만, 청바지에서 가느다란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잠을 못 잤는지 반쯤 힘이 풀린 검은 눈동자 밑에는 다크서클이 진했다.
이준은 말없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
그제야 내가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나갔다 돌아오니 집은 도둑이 한바탕 해먹은 것처럼 엉망진창이고, 그 중심에는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있다.
“저, 그게요.”
누가 봐도 오해할법한 상황에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더 놀라웠다.
“…누구세요?”
그는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했다. 자기 집에 누가 멋대로 침입했든 상관없다는 듯. 현관을 지나 거실과 연결된 부엌으로 갔다.
묘한 분위기에 덩달아 차분해진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가 누구고 왜 찾아왔는지. 그는 싱크대에 등을 걸치고서 묵묵히 날 쳐다보았다.
“…그래서 앞으로 2주 정도 더 결석하면 출석 일자가 부족해 유급 처리가 돼서 2학년을 다시 다녀야 해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작정하고 이 지경까지 와서 내 경고가 별로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도 얘기를 더 끌지 않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우앗!?”
그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 줄은.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는 뒤따라 한쪽 팔로 날 감싸듯 바닥에 엎드렸다.
“아우… 아파라….”
“으… 괜찮아요?”
만일 그가 별 이유 없이 그랬다면, 그의 질문에는 대답 대신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가 왜 그랬는지. 답은 바로 뒤에 있었다. 낡은 목제 장롱이 두 쪽으로 갈라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장롱이 쓰러지는 순간, 그가 날 밀어 구해준 것이다.
“다친 데 없으세요?”
“아, 네.”
나는 일어나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그 말을 건네기 전, 이준은 이번에는 내 한쪽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대로 현관으로 가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나가주세요.”
“네?”
그는 자신의 느닷없는 행동에 의미심장한 이유를 댔다.
“여기 더 있다간 위험해요.”
“저기, 뭐가 위험하다는….”
“죄송해요.”
그리고 내 말을 뚝 자르면서 날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선생님한테는 제가 나중에 직접 찾아간다고 전해주세요. 정말 미안해요!”
쾅!
세차게 닫히는 문소리가 귀를 때렸다.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집 밖으로 내몰렸다. 할 말을 잃고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갑자기 뭐가 위험하다는 것인지. 문전박대에 없던 화가 치솟으려 했다.
그렇다고 여기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문을 발로 차버리고 싶은 심정을 꾹 누르며 그의 집을 뒤로했다.
이리하여 소득 없는 가정방문을 끝냈다. 굳이 말하자면, 살아있는지 확인이라도 했다. 어쨌든 난 하라는 대로 일을 마쳤으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잠이나 자자.
그럴 예정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 일상은 그대로 어긋나버렸다.
◇
뜨거웠다. 불구덩이 속을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사납게 작렬했다. 괴로웠다. 온갖 몸부림을 쳐댔다. 구역질하듯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나 아픔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이 더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뇌에서는 컨트롤러가 고장 난 영사기처럼 쉬지 않고 기억을 쏟아냈다.
번화가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짙푸른 하늘이 자욱한 밤거리를 지나.
그와 만났을 때.
과거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이곳이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째서 이토록 괴로운지. 모든 생각이 번지는 고통 앞에서 불붙은 종이처럼 재가 되어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
버티지도, 피하지도 못한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
깨어났다.
길게 심호흡해보았다.
살아있다. 정말로. 긴 꿈이었다.
시야가 흐렸다. 눈가가 축축했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상체만 일으켜 아직 잠이 덜 깬 눈동자를 굴렸다.
깔끔한 베이지색 벽지로 감싼 작은 방. 내가 누운 흰 침대를 중심으로 고풍스러운 목제 가구들이 즐비했다. 값비싼 호텔 싱글 룸을 연상케 하는 낯선 곳이었다.
“으.”
침대 밖으로 나오려고 움직이자 등이 저렸다. 입은 티셔츠를 걷어보니 복부에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었다. 다행이라면 조금 쑤실 뿐이었다. 언제 다친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어났니?”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유창한 한국어와 달리 어깨까지 내린 웨이브 진 긴 금발과 크고 맑은 파란색 눈이 잘 어울리는 서양인이었다. 흰 니트에 두꺼운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녀는 문턱에 기대어 청 스키니진 속 늘씬한 두 다리를 꼬고서 날 향해 미소를 보였다.
“은세연?”
그녀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누구신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미스트’라고 불러.”
이름보다는 별명에 가까운 단어였다. 미스트는 차가 담긴 노란 머그잔을 내게 주고는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축하해. 사흘 만에 깨어났네.”
“…뭐라고요?”
“너 사흘 동안 혼수상태였어. 다 죽어가던 걸 내가 살려놨지.”
사흘. 나는 잠시 기억을 차근차근 되감아 보았다.
이준의 집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따라 돌아와 집에 도착했다.
도착했다?
아니다. 도착하지 못했다. 거리를 벗어나 번화가에 다다르긴 했는가. 모르겠다. 한밤중의 귀갓길을 지나 내가 도착한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그녀가 말한 사흘의 기억이 비어 있었다.
“기억 안 나나 보네.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미스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사흘 전 밤, 이준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편의점을 가던 중 길 한복판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때의 나는 빈사 상태였고, 상처가 깊어 조금만 늦었더라면 적기를 놓칠 뻔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지금. 나는 깨어났다.
“나중에 준이한테 고맙다고 해.”
“그럼….”
“잠깐만.”
미스트는 내 말을 끊고서 말했다.
“우리 번갈아가면서 하나씩 질문하자. 나도 물어볼 게 있거든.”
그녀는 내게 종이 몇 장을 보여줬다. 그것은 어떤 인물에 관한 정보였다. 종이에 나온 사진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나, 그리고 부모님. 그녀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지 의문이 풀렸다. 서류에는 신상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것을 조금 벗어난, 특별한 정보도 같이 기재되어 있었다.
미스트가 물었다.
“너, 마법사지?”
이미 알면서 굳이 떠보는 것임을 눈치챈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태초부터 인간은 ‘살아남는 것’을 우선시했다. 누구랄 것 없이 태어나면서 그렇게 빚어졌다. 주어진 환경 속에 각자의 신체와 지능으로 생존해왔다. 시대와 문명, 화합과 전쟁, 지식과 무기. 모든 것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탄생했다.
마법 역시 고대에는 그런 산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진보하는 기술에 밀려 중세부터는 설화, 민담, 전설. 허구 속 신비로 사람들의 이야기에 자리 잡았다.
마법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근대 말, 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고 얼마 안 지나서였다. 한 탐험가가 우연히 재발견한 것이 계기였다.
그러나 마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진 못했다.
몇몇 이들에 의해 재발견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 그들은 통칭 ‘재단’이라는 ‘세계마법총괄조직’을 세웠다. 결국, 마법은 음지에서 소수에 의해 발전을 거듭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여기까지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들은 ‘현대까지 걸어온 마법’의 일대기이다.
나는 부모님 두 분 다 마법사였기에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만 두 분처럼 평생을 마법에 바칠 생각은 없었다. 그만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해외 출장을 나간 뒤로는 마법에 관해 거의 잊고 지냈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그쪽 세계와 재회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각설하고.
그녀 말대로, 난 마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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